인간의 본성은 어떨까? (성선설 VS 성악설)
여러분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구체적으로 성선설을 지지하시나요 혹은 성악설을 지지하시나요?
저는 개인적으로 성악설을 전제로 인간이란 존재에 접근합니다.
여기서 ‘악’이라 함은 인간이 규정한 도덕과 윤리상의 ‘악’이죠.
인간이란 존재의 특성과 기질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 살면서 가져보면 좋을 마인드를 논해보고자 시리즈로 기획한 ‘인간탐구 시리즈’.
오늘은 그 첫 번째 편으로 인간의 본성을 선악의 개념을 통해서 고찰해보겠습니다.
![[인간탐구 시리즈] 인간의 본성과 관련한 고찰(1) -선악편-_#001 1 선악 1](https://www.philosoilet.com/wp-content/uploads/2023/08/선악-1-1024x683.jpeg)
1. 선악은 무엇인가.
우선 선악의 개념부터 살펴봐야겠죠.
아시다시피 선과 악은 한자어 입니다.
선(善)은 ‘옳다’, ‘착하다’ 또는 ‘훌륭하다’는 의미이고,
악(惡)은 ‘옳지못한’, ‘나쁘다’ 또는 ‘미워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선악은 상호 병존적이며,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한 쪽에 선이 있으면, 그 반대엔 악이 있는 것이죠.
우리는 초등학교 도덕시간에 어떤 언행들이 착하고 나쁜지, 선과 악으로 규정된 것들에 대해 배웠습니다.
예컨대, 불우이웃이나 도움이 필요한 친구를 도와주면 나는 착한 사람이 되며 선의 편에 서게되지만, 이들을 무시하면 나는 나쁜 사람이 되고 악의 편에 서게 됩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 하나 외면했다고 나쁜 사람이라니,,, 어감이 영 달갑지 않죠?
하지만 도움을 줬을 때 들을 수 있는 착한 사람은요?
너무 관대한 표현이라 부담스러울 수는 있지만 듣기에는 좋지 않나요?
왜 이런 감상의 차이가 생길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앞서 언급한 예시와 같이 과거부터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그럼 누가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왜 배워야 했을까요?
– 생존을 위한 ‘Rule’의 발생.
문명이 발생되기 이전으로 돌아가보죠.
인류처럼 집단생활을 하는 사자, 코끼리, 개미, 범고래 등의 동물들을 보면 그들만의 Rule이 존재합니다.
힘을 합쳐 사냥하고,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부터 보호하고, 힘의 위계가 생기니 우두머리가 정해지면서 그 우두머리에 복종하는 대신 우두머리는 집단의 생존을 책임지는 등..
서로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자연에서 생존하기 위해 Rule은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인류 역시 자연에서 하나의 개체로서 독립적으로 생존하기엔 신체적 조건에 한계가 있었고, 앞서 언급했던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들과 같이 집단을 이뤄 생활하는 것을 택하면서 함께 사냥하고, 음식을 먹고, 쉬는 동물이 되었습니다.
신께서 내리신 축복일까요.
일반적인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들과는 다르게 인류는 힘을 합치니 그 퍼포먼스가 여타 동물들을 압도했습니다.
웬만한 포식자는 인류집단을 위협할 수 없게되자 개체 수는 증가하기 시작했고, 수렵과 체집 생활에서 농업 혁명에 따른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인류는 곧 우리가 알고 있는 찬란한 문명을 건설할 수 있게 되었죠.
– 선악과 종교의 등장.
하지만 더 강한 힘을 가진 개체가 다른 개체를 지배한다는 원초적 본능, 힘의 논리가 원시적으로 발생한 Rule을 더 이상 무용지물로 만들었습니다.
때문에 인류는 생물학적인 생존을 넘어, 인류집단 내에서 생존하기 위해 Rule의 고도화가 필요해졌습니다.
그렇게 선악의 개념과 종교가 등장합니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인류는 여타 동물들은 가지지 못 한 특별한 능력;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의 능력이 있습니다.
오직 물리적인 힘의 논리만으로 우두머리를 향한 복종과 집단을 유지했던 것을 종교와 선악의 개념을 통해 “신이 지켜보고 있다.”, “자연재해는 신의 노여움을 산 것이다.” 등과 같은 보이지 않는 두려움과 “왕이라면.”, “백성이라면.”, “남자/여자라면.” 등과 같은 도덕과 윤리, 관습들이 만들어져 동족간 상생과 협력을 고도화 합니다.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면 태형에 처한다.”
“신이 선택한 왕을 섬겨야 한다.”
“신의 선택을 받은 우리(민족/부족)가 악의 세력(적대세력)을 척결해야 한다.”
위와 같은 논리는 세계 역사를 살펴보면 종교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논리입니다.
결국 선악의 개념은 집단의 생활안정(생물학적 생존)과 지배층의 집단에 대한 지배력 강화(정치적 생존)을 도모하고자 발생한 상호 합의적 성격의 개념으로, 상호간 따라야 하는 질서, Rule인 셈이지요.
인류가 만들어낸 Rule은 점차 우리가 알고 있는 도덕과 윤리, 종교로 여러 세대와 시대를 거치면서 변형되고 가공되면서 질서로써 자리잡았습니다.
이러한 질서를 후세에게 교육하는 것은 종족과 문명의 지속적인 생존과 번영을 위해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겠지요.
2. 인간이 악한 존재인 이유.
– 그걸 누가 정했는가.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와서,, 저는 인간을 성악설에 기반하여 접근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선악의 개념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알 수 있듯 자연에서 생존만을 목적으로 하는 힘의 논리를 인류가 ‘악’으로 정의했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인류가 악으로 정의한 것들 대부분은 원초적, 동물적 ‘본능’에 가깝습니다.
이를 ‘이성’으로 절제하지 못 하고 집단에게 직/간접적 해를 입히는 모든 것은 악이라는 것이죠.
아니, 그럼 동식물들은 모두 악한 존재인가?
네. 적어도 인류가 규정한 도덕과 윤리에 의해서는요.
하지만 우리는 특정 동식물을 향해 ‘위험한 개체’라고 하지 ‘악한 존재’라고 하진 않죠.
또 대부분 인류사회 전체에 위협이 되지 않는 한 관리가 필요한 시각으로 바라보지 ‘없애야 할 존재’로 바라보지는 않죠.
인류가 만든 도덕과 윤리의 적용대상은 세상 만물이 아닌 오직 인간에게만 국한되니까요.
이게 인간을 성악설에 기반으로 바라보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 특정 종족, 집단에 의한 통제.
자, 도덕과 윤리, 종교, 선악 이 모든건 인류라는 집단이 인류사회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만들어낸 질서로써 ‘수단’인 것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린 저것들이 이야기하는 인간이 되었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죠. 요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두 번째 이유입니다.
성선설에 따르면 인간이 동물적 본능(악)과 인간의 본성(선)이 ‘구분되어 동시에’ 가지고 태어난다는 면에서 인간의 본성이 선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 동물적 본능이 발휘되더라도 인간의 본성이 선하기에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하죠.
어떻게 보면 성선설에 따른 인간의 선한 본성 때문에 도덕과 윤리, 종교 등의 질서가 생겼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면 사실 통제와 질서 따위는 필요가 없습니다.
인류 모두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으로 ‘당연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인류는 역사적으로 특정 종교의식을 제외하고는 동물적 본능을 통제하도록 끊임없이 질서를 고도화 하고 있습니다.
너무 선하니까 그럴까요?
대부분 새로이 식별된 위협이나 위험이 계기가 되었죠.
결국 무질서한 자연상태에서는 인간도 그저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고있는 동물의 한 종으로서 여타 동식물들과 같이 생존을 목적으로 하며, 인류 집단과 사회에 위협이 되는 것들을 통제하려고 하는 것 뿐 그 본질은 다르지 않습니다.
자연의 동식물이 인간에 의해 최소한의 통제를 받고 있는것과 같이 인간 또한 통제가 필요한 본질적으로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 사회질서 유지.
성악설의 세 번째 근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표적인 질서; ‘법(Law)’ 입니다.
특히 ‘형법’의 존재이죠.
형법은 국가의 권력으로 개인에게 특정 작위나 부작위 의무를 요구 및 강제하며, 이를 위반할 경우 형벌을 부과하는 무서운 법입니다.
주로 타인의 신체, 재산에 관한 법익을 침해하지 않을 것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동물적 본능에 따르면 내가 생존하기 위해 다른 개체를 잡아먹거나, 먹이를 빼앗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인류사회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악이라 규정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이라 규정했죠.
형법 이외에도 민법 상법 헌법 등 모든 법률은 인류가 구성한 사회와 그 시스템을 구축하고 유지하는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법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사회는 무질서한 자연상태, 그저 모여서 단체생활하는 원시사회로 회귀하고 문명은 파괴될 것입니다.
굳이 더 설명하지 않아도 인간의 본성은 문명사회 유지를 위해 통제가 필요한 악한 존재라 할 수 있죠.
![[인간탐구 시리즈] 인간의 본성과 관련한 고찰(1) -선악편-_#001 2 선악 2](https://www.philosoilet.com/wp-content/uploads/2023/08/선악-2-1024x682.jpeg)
3. 선악? 그런 거 없다.
사실, 애초에 인간이 정의한 선악의 개념은 자연과 우주적 관점에서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 또한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 한들 본성이 ‘악한 것’이지, ‘악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인류는 역사상 유래없는 문화와 기술의 진보와 고도화된 문명을 건설했고 진행중이며, 그만큼 이념, 민족, 국가간 이해관계가 복잡한 세상을 조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대가없는 호의, 배려들과 같은 인류애도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을 통해 인간의 본성은 악함과 동시에 선함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생존 관점에서 볼 때, 다음과 같은 논리로 이타적이고 공공적인 양상을 띄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존하기 위해 당신이 생존해야 하고,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삶의 터전을 보전해야 하며, 보전하기 위해 우리의 후세를 보아야 하고, 후세를 보기위해 사회의 영속과 번영이 되어야 한다.”
이 처럼 핵심은 ‘인류사회의 영속과 번영’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 종교, 도덕과 윤리, 이념과 같은 ‘질서’는 이를 위한 ‘수단’일 뿐이지 ‘목적’이 될 수 없으며, 인간도 결국 생존을 목적으로 하는 동물입니다.
다만 자연에서의 생존을 넘어선 넓은 의미의 생존; 문명사회에서의 생존, 최근엔 영적인 의미의 생존까지 그 개념의 확장에서 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 사실을 인지하고 주변을 둘러본다면 본질적으로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생각하는 생존을 하기 위해 행동하고 말 할 뿐이겠죠.
그러니,, 좋은 사람을 찾으려, 나쁜 사람을 걸러내려 발버둥 치거나 원망할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생존을 하면 되는 겁니다.
그저 생존하기 위해 오늘 하루를 살아갈 뿐.
그 뿐이라고 생각합니다.